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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

[공자께서 또 다시 말씀하시었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에 가깝고, 힘써 행하는 것은 인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에 가깝습니다.] 가어의 원문에는 애공이 다음과 강튼 말을 하다. "아 선생님의 말씀은 참으로 아름답고 지극하십니다. 과인이 실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이루어내기에는 원래 부족한 인간일 듯 싶습니다. " 그러자 공자는 그 애공의 말을 받아 다시 지, 인, 용이라는 주제를 끄집어내면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자사는 이 대화에서 여기뿐만 아니라 딴 곳에도 들어있는 애공의 리액션 부분을 다 삭제해버렸다. 불필요한 췌설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주희는 애공의 리액션을 삭제해서 그냥 공자의 말을 연결시키 마당에는, "자왈"이라는 도입어는 연문이라고 간주하고 그것은 삭제되어야 한..

카테고리 없음 2025.06.27

주희장구

사람의 임금 된 자는 인을 구현해야 하며, 사람의 신하 된 자는 경을 구현해야 하며, 사람의 아들 된 자는 효를 구현해야 하며, 사람의 아비 된 자를 구현해야 하며, 국인들과 교제할 때에는 신을 구현해야 한다. 이 대학의 표현도 중용의 달도와는 다르다. 여기 "천하지달도오, 소이행지자삼"이라는 표현에 있어서 오달도와 삼달덕의 관계를 "길"과 "감"이라는 글자로 나타낸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감"이라고 길을 가는 것이다. 즉 그 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소이행지자"이므로 그것은 "그 도를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적 덕성이다. 이 세 달덕, 즉 인간에게 구유 된 보편적 덕성이야말로 다섯 달도의 관계를 실현케 해주는 덕목이다. 그러니까 맹자가 친, 의, 별, 서, 신이라 하여 다섯 인..

카테고리 없음 2025.06.26

수신과 사친과 지인과 지천

군자는 자기 몸을 닦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몸을 닦을 것을 생각하면 어버이를 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버이를 섬길 것을 생각하면 사람을 알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을 알 것을 생각하면 하느님을 알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중용 전체 문장 중에서 가장 위대한 명제를 담고 있는 메시지 중의 하나로 꼽는 명언이다. 결국 수신과 효에서 성론을 끌어내기 위한 다리역할을 하고 있다. 수신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신독의 차원에서의 주체의 심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관계의 횡적 연대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 최초의 계기가 가장 가까운 혈육을 섬기는 효의 마음이며, 그 효는 외재적 권력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인간의 본연적 생명력에서 발출되는 인의 감정이다. 그러나 이 사친은 가족주의적 관계를 넘어 인간이..

카테고리 없음 2025.06.25

사마천의 언급, 중용은 자사작이다.

이제 대강 독자들은 중용이라는 텍스트를 접근해 들어가는 시각의 대강을 파악했을 것이다. 이제 텍스트 그 자체의 비평에 관한 이야기를 거쳐 본문으로 진입하는 수고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중용은 누가 언제 쓴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란 참으로 쉽고도 어렵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사서라는 책, 그 편집체계는 이정을 거쳐 주희에게서 집대성된 것인데, 그중에서 중용은 유일하게 한 사람에 의한 단일저작으로 예부터 인지되어 왔다. 논어는 기본적으로 공자의 말을 모은 책이라고 하지만, 공자 이외의 제자들의 말이나, 제자들끼리의 말, 그리고 공자의 언행록과 무관한 기사도 들어가 있는 잡다한 성격의 것으로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편집되면서 서서히 형성된 것이다. 맹자도 사마천 사기의 맹자순경열전에 의하면, 맹가..

카테고리 없음 2025.06.22

주희의 중용장구서

중용은 과연 누가 무엇을 위해 지은 것일까? 그 간결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자사자께서 도학이 그 전승을 잃을까 걱정하시어 중용을 지으신 것이다. 참으로 대가다운 일문이라 할지 않을 수 없다. "중용, 하위이작야"라는 한마디 속에 중용의 단생에 관한 모든 것을 묻고 있고, 또 그 모든 것을 곧 답변해 버린다. 이 첫마디의 무게감은 전체를 관망하여 장악한 대가가 아니면 꺼내기 어려운 언표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선 "중용장구"라는 말부터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희가 신유학운동의 기치로서 "사서"를 표방한 것은 대중이 모두 아는 바이다. 그중 논어와 맹자는 이미 알려져 있었던 문헌으로 주희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객관적 전승이 축적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두 책에 대해서는 지나간 혹은 당대학인들의 주..

카테고리 없음 2025.06.19

식색의 본능

나 사람이든, 내 서재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든, 모든 유기체는 식과 색을 떠날 수 없다. 식은 생존을 위함이요, 색은 재생을 위함이다. 그러나 자연상태에서는 오히려 식 색이란 과/불급이 거의 없다. 나는 요즈음 집에서 닭을 키우고 있다. 닭은 확실히 식성이 좋지만, 아무리 진수성찬을 베풀어도 필요한 양식 이외의 분량을 취하는 법이 없이 다. 과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색도 종족번식을 위한 생식 이외의 정의 낭비는 거의 없다. 연어도 그 기나긴 수년간의 생애의 여정 속에서 마지막 순간에 단 한 번 사정을 하고 죽는다. 인간처럼 매일 정액을 나비하는 동물은 자연계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약육강식"이 니 "정글의 법칙"이니 하는 따위의 개년도 가치론적으로 완벽하게 왜곡된 언어일 뿐이다. 정글의 상계에서도 ..

카테고리 없음 2025.06.15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과연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이것을 우리말로 풀면 이와 같다. "천이 명하는 것, 그것을 일컬어 성"이라 한다. 사실 가장 정직한 해석이란 이 풀이 이외로 아무것도 할 말이 없다. 여기서 성을 놓고, 본체니 본성이니 리니하는 따위이 외재적 규정성을 가지고 접근해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사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 사기일까. 일차적으로 성에 대해서 규정하는 문장을 앞에 놓고, 대뜸 그 본래의 규정성 이외의 개념을 가지고 거기에 덮어씌운다는 것은, 차돌을 앞에 놓고 금이라 우겨대는 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성은 무엇인가, 이 문장이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천이 명하는 것이다. 성은 천이 명하는 것이라고 하는 그 자체의 규정성을 떠나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아니 된다. 이 문장은 본시 "성, 천명야"라 해도..

카테고리 없음 2025.06.13

천명이 명하는 것 그것을 일컬어 성이라한다.

실제 중용을 주석한다는 것은 공포스럽다. 평생을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보았으나, 이 말처럼 온축되어 심오한 말이 없고, 세상의 지혜의 문학으로 말한다 해도, 이것처럼 정직하고 영원한 인간의 상황을 다 함축한 언어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주석에 들어가기 전에 몇날 며칠을 이 첫 구절을 놓고 어떻게 접근할까 고민을 하고 또 해보았으나 내 머리에 떠오르는 묘안은 없었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한대의 정현주, 그리고 당대의 공영달소, 그리고 석돈 중용집해에 실린 송선하의 제설, 그리고 주희의 장구, 어록, 혹문의 장황한 해석이래 명과 청대를 거쳐 오늘날의 동아시아 구미 석학들의 다양한 논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한우충동하는 주석이 첩첩이 쌓여있으나, 그것을 다 일별 하여 보..

카테고리 없음 2025.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