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중용을 주석한다는 것은 공포스럽다. 평생을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보았으나, 이 말처럼 온축되어 심오한 말이 없고, 세상의 지혜의 문학으로 말한다 해도, 이것처럼 정직하고 영원한 인간의 상황을 다 함축한 언어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주석에 들어가기 전에 몇날 며칠을 이 첫 구절을 놓고 어떻게 접근할까 고민을 하고 또 해보았으나 내 머리에 떠오르는 묘안은 없었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한대의 정현주, 그리고 당대의 공영달소, 그리고 석돈 중용집해에 실린 송선하의 제설, 그리고 주희의 장구, 어록, 혹문의 장황한 해석이래 명과 청대를 거쳐 오늘날의 동아시아 구미 석학들의 다양한 논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한우충동하는 주석이 첩첩이 쌓여있으나, 그것을 다 일별 하여 보아도 결코 내 머릿속에 명료한 포커스는 잡히는 것이 없다. 모두 기존에 형성된 관념들을 가지고 꿰맞추고 있을 뿐이다. 그중 강력한 개념들은 모두 송대에 형성된 것이다. 물론, 본 한글역주는 주희의 장구해석을 충실하게 소개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희가 중용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틀일 뿐이며, 중용자체에 대한 설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송대에 새롭게 형성된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주희의 디스꾸르가 그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내가 해석을 다시 내려도 독자들은 이렇게 반문학 것이다."그것 또한 도올의 해석의 틀이지, 중용 자체의 해석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소, 맞는 말이다. 나의 해석은 내가 살고 있는 시대정신의 디스꾸르라고 말하여도 나는 항변할 길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는 이러한 합의에는 이를 수 있을 거싱다. 어느 시대의 해석보다도 현 21세기초의 해석이 보다 중용의 실상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시각을 개방해놓고 있다고 중용은 단지 도통의 체계 속에서 바라보거나, 도학의 관념 속에서 규정하려고 드는 것은 중용에 대한 바른 이해가 될 수가 없다. 더구나 우리는 이미 통서에서 밝혔듯이 중용을 자사라는 사상가의 단일한 전적으로 보라보는 시각을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가설이 전혀 옳지 못하다 할지라도 쏟아져 나오는 간백자료의 분위기로 볼 적에 중용의 저자라는 어떤 사상가의 이와 같은 정교한 사상체계가 성숙할 수 있었던 지적 환경이 자사의 시대에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충분히 논의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치 않다. 이제 제1장의 언급은 맹자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맹자의 성론 이전에, 맹자의 다양한 언어를 탄생시킨 프로토타입의 사유체계로서 우리는 이 구절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세간의 학자들이 규정하는 바, 소위 성선, 성악, 이라는 개념도 적용될 수 없다. 자사가 말하는 성이란 선이라든가 악이라든가 하는 가치판단적인 개념규정 이전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자도 성상근을 말했을 뿐, 성을 독자적인 규정성을 갖는 주제로 생각하질 않았다. 우리는 맹자 순자의 논의를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아니되며,근원적으로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논어 공야장12에 보면 자공의 말로써 다음과 같은 파편이 수록되어 있다.
"선생의 문장은 얻어 들을 수 있으나, 선생님께서 성과 천도를 말씀하시는 것은 얻어 들을 수가 없다."
이런 자공의 회상이 어늘 때 발설된 것이며 어느 시점에 정확히 기록된 것인가 하는 것은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해왔다. 천도는 장자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한 어휘이며, 성은 맹자가 양묵의 이단에 대해여 인성 내에 도덕적 선험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활성화시킨 논의이다. 그러므로 이 파편은 이미 맹자와 장자의 도전을 거친 이후에, 유교학단 내에서 공자의 사상이야 말로 맹자의 성선론이나 장자의 초세간주의로 규정될 수 없는 그 이전의 소박한 인문주의의 표방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강력한 후대의 주장이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논의도 일단 근사하게 들리지만, 최근 죽간 자료의 등장은 이러한 관점이 근원적으로 성립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단정 지운다.
상기의 자공 로기온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매우 재미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문장이란 기실 자사의 언어로 바꾸면 교와 동의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짧은 센텐스 속에 지금 중용의 첫 구절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주요 개념이다 들어있다. 천, 성, 도, 교라는 어휘가 다 들어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공의 로기온은 공자의 시대에 이미 활성화되고 있었던 주제들에 관하여 공자가 별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보고일 뿐이며, 그러한 형이상학적 담론이 공자의 시대에 부재하였다는 것을 천명한 면제는 아니다. 공자는 자사의 언어를 빌리면, 천이나 성이나 도와 같은 것은 이미 자신의 삶 속에 체득된 것이기 때문에 굳이 발설할 필요가 없으며, 오직 교라고 하는 현실적 관심, 즉 어떻게 훌륭한 사의 지단을 형성시켜 나라의 여약형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느냐를 `고민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제자들이 하학을 통하여 스스로 상달하기를 바랐으며, 그가 상달의 규범이나 규율이나 규모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바로 노자안지하고 붕우신지하고 소자회지하는 것을 인생의 이상으로 삼았던 공자라는 교육자의 위대함이었다.
4대 성인 중에서도 공자의 유별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혹독한 금욕주의적 상저였으며 죽음에 대한 그의 자세도 준법정신만큼이나 종교적 안위나 구원에 대한 갈망이 강렬했다. 예수나 싯달타도 종교교단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결국 인간세에 초세간적 흐름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다르다. 제자가 밥을 짓다가 밥을 먼저 떠먹으면 쟤가 내가 먹을 밥 먹는다 먹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하는 아주 인간적인 한 사람일 뿐이었다. 배고픔을 느끼고 노여움과 아쉬움을 느끼고, 또 때로는 눈물짓고 통곡하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 공자는 철저히 입세간적 인문주의자였고, 보편주의자였고, 교육주의자였다.
따라서 그의 손자대에 이르러 그에게서 묵과되었던 성과 천도가 본격적으로 디스꾸르화되는 것은 너무도 지당한 사상적 발전이었고 인세의 필연경로였다. 자아, 그렇다면 자사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일체의 선입견이 없는 중용의 문구 그 자체로써만 문제의 핵심에 접근해보자.
이 세 개의 문장은 동일한 신택스를 과시하고 있다. 맨 앞의 두 글자는 동명사구를 이루는 주억적 성격의 부분이다. 그리고 맨 끝의 한 글자는 실제로 이세개의 문장이 천명하고자 하는 실제의 주제들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모두 지위라는 두 글자로 채워져 있다.
여기서 보면 형이상자가 명료하게 하나의 명사구로 분립되어 있고 그것을 지라는 지시대명사가 받고 있는데 이 지는 또 위라는 동사의목적에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평상적인 어순에 따라 동사의 뒤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동일한 계사 문장에 있어서도 다음과 같은 경우는 위와 지의 어순이 거꾸로 되어 있다.
이러한 도치는 지시대명사가 지시하고 있는 참목적어를 강조하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한번 음에 되었다가 한 번 양이 되는 것, 또 그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것을 지시하는 지라는 대명사가 동상 앞으로 나가, 곧바로 그 동명사구에 연접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의에 합당한 것, 그것을 일컬어 질서있는 상태라 일컫고, 예의에 합당치 아니한 것, 그것을 일컬어 어지러운 상태라 일컫는다.
대체적으로 지가 도치되는 경우는 앞의 목적구가 동명사적인 복합구조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개념의 바운더리가 모호하기 때문에 그것을 확정적으로 묶어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제 중용 원문으로 돌아가서 보면 이 세개의 문장이 궁극적으로 천명하고자 하는 것은 성과 도와 교라는 세 주제이며, 이 세 주제가 어떻게 정의되고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밝히려는 것이다. 앞의 두 글자는 마지막 개념에 대한 술부적 성격을 지니며 그것은 실제로 마지막 글자를 정의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1 의명제는 앞의 두 글자가 주어+동사의 구조로 되어있지만, 제2, 3 명제의 동사+목적어의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제1의 명제의 주어+동사의 동사는 자동사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제2, 3 명제의 동사+목적어의 동사는 명백하게 타동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바로 앞 문장의 주제를 받아 그 목적어로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