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사람이든, 내 서재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든, 모든 유기체는 식과 색을 떠날 수 없다. 식은 생존을 위함이요, 색은 재생을 위함이다. 그러나 자연상태에서는 오히려 식 색이란 과/불급이 거의 없다. 나는 요즈음 집에서 닭을 키우고 있다. 닭은 확실히 식성이 좋지만, 아무리 진수성찬을 베풀어도 필요한 양식 이외의 분량을 취하는 법이 없이 다. 과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색도 종족번식을 위한 생식 이외의 정의 낭비는 거의 없다. 연어도 그 기나긴 수년간의 생애의 여정 속에서 마지막 순간에 단 한 번 사정을 하고 죽는다. 인간처럼 매일 정액을 나비하는 동물은 자연계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약육강식"이 니 "정글의 법칙"이니 하는 따위의 개년도 가치론적으로 완벽하게 왜곡된 언어일 뿐이다. 정글의 상계에서도 "약육강식"이란, "식"에 대한 언어로서는 부적합하다. 환경에 적응력이 강한 종자가 살아남는다는 법칙은 타당하지만, 단순히 강하다고 해서 정글의 강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일상적 "식"의 세계에서 "약육강식"을 운운하는 것은 자연현상의 왜곡이다. 사자가 소나 말을 잡아먹는 것은 우리가 밥을 먹는 것과 똑같은 "식"이다. 사자가 타 동물을 헌팅하여 먹잇감을 취득하는 성공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매우 저조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먹이만을 취하는 것이다. 힘이 강하다고 해서 타종을 멸종시키는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호랑이도배가 부를 때는 코앞에서 토끼가 얼쩡거려도 평화롭게 바라만 본다. 과욕이 없다. 그들은 오직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공격성을 발휘할 경우, 그것은 가치판단적 공격성에 해당되지 않는다.
내가 키운 수탉 한 마리가 병아리 식절부터 날갯짓을 하면 수직으로만 상승하는 기묘한 습성이 있어서, 이름을 "콥타"라 지었다. 그런데 이 콥타는 매우 식성이 좋다. 그래서 서재 앞에서 내가 맛있는 과자를 주면 병아리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먹는데 좌우전후를 불고하고 먼저 독차지하다시피 먹고, 남의 것까지 가로채는 왕성한 습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 콥타가 몇 달 만에 거대하고 의젓한 아름다운 색깔의 수탉으로 변모했다. 이 수탉인 질서감을 부여하는 관건이 "울음"이다. 수탉의 울음은 권위를 상징한다. 그리고 울기 시작하면서 대체로 성행위를 시작한다. 그런데 성행위가 시작되면 암컷들과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 호오의 관계가 생겨난다. 콥타와 같이 자라난 동기생 암컷 중에 너무 성장 템포가 느리고 사이즈가 작은 두 마리가 있어서 이름을 "피노"와 키오"라고 지었다. 그런데 이 피노와 키오는 작지만 단단하고 매력이 있었다. 성장해 가면서 콥타는 피노와 키오와 친근감을 두텁게 했다. 이 두 마리와의 성교회수가 비교적 잦은 것이다. 그런데 어제 오랜만에 내 서재 앞마당에서 맛있는 과자를 주었다. 그런데 나는 놀랄 만한 사실을 목격했다.
과자를 쪼개서 땅에 떨어뜨리기 시작하자 콥타가 제일 먼저 왔다. 그런데 그토록 좌우불고하고 잘 먹던 콥타가 먹지를 않고 "꾹꾹꾸꾹"하는 특이한 소리로 암탉을 불렀다. 그러자 피노와 키오가 왔다. 그런데 타 암컷들은 접근 못하게 했다. 그리고 자기는 안 먹고 지키면서 피노와 키오가 배불리 먹도록 해주었다.
먹이를 먹지 않고 타에게 양보하는 사양의 미덕을 새끼를 부화시켜 양육하는 어미닭에게서 극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이 경우는 약자를 보호하는 어미의 역할을 생존의 본능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콥타가 피노와 키오에게 사양지덕을 발휘하는 현상은 단순히 생존본능이라는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디테일한 동물행태학의 논의를 회피하겠으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고등한 인간의 도덕성이라고 부르는 행동의 모든 원초적인 형태가 동물의 행태 속에서도 충분히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속적으로 누적되거나 일관된 원칙을 갖지 못한다는 점은 지적될 수 있으나 상황적으로 인간의 모든 고매한 도덕의 원형적 패턴은 동물의 세계 속에서도 존재한다. 아니, 식물의 세계에서조차 모종의 도덕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지금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우선 "본능"이라는 것은 본능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대체적으로 부정적 의미에서 사용하는 가치판단적 본능은 "문명의 상황에서 누적적으로 왜곡된 특수한 인간의 행동패턴" 일 뿐이며 그것을 자연상태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고자가 "생지위성"이라고 말했을 때, 그 "성"은 "천명지위성"의 "성"과 대체적으로 맥락을 같이한다고 말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늘이 명하는 성, 즉 대자연이라는 우주생명과 끊임없이 교섭하는 성을 송유가 말하는 식의 본성이나 본질, 천리니 도심이니 하는 협애한 가치의 범주 속으로 특수화하지 않고 "생"으로 개방시켜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도덕"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모든 선입견을 타파하지 않는 한 우리는 "중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성"을 "생"으로서 개방시키지 않는우리는 매/순 이전의 웅혼한 자사의 사상 속으로 바르게 진입할 수 있는 통로를 봉쇄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논의를 나의 해석일 뿐이라고 말하면 아니 된다. 놀랍게도 나의 논의를 정당화할 수 있는 자사의 또 하나의 저작물이 최근 고분묘의 죽간으로 발견된 것이다.
곽점에서 나온 "성자명출"이라는 죽간이 바로우리의 논의의 대상인데, 이 죽간의 텍스트 문제는 여기서 논외로 할 수밖에 없다. 워낙 범위가 넓고 복잡한 문제이며 여기서 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면 우리의 주제가 빗나가 버린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사계의 축적된 논술자료들을 알람 해주기를 바란다. "성자명출"은 내용이 결코 적은분량이 아닌 방대한 성에관한 논의로서맹자이전의시대로 확실하게 소급되는 문헌이다. 그 논의를 일별해보면, "중용" 1장의 성립과정을 별도로 척출하여 후대로 내려잡아야 한다는 일인학자들의 번쇄한 고증논의를 일거에 무가치한 쓰레기로 만들어 버린다. 아마도 죽간이 나온 형문의 무덤 속에 대신 파묻어 버려야 할 지도 모겠다. 한국의 학자들은 그 동안 이런 고증방면으로 너무 공부한 것이 없고 성과를 집약한 학설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편할지는 모르겠으나, 오히려 고증의 대가인 일인학자들이 무안케 되는 그 착잡한 심정 앞에 엎드려 절하면 충분한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