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이라야 자기의 타고난 성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다. 자기가 타고난 성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게 되어야 타인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가 있다. 타인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어야 모든 사물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어야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다.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어야 비로소 천과 지와 더불어 온전한 일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자사의 언어에 즉해서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첫 줄의 "진기성"의 "성"은 물론 "자명성위지성"의 "성"을 받은 것이다. "천하"라는 말은 항상 현실적인 인간을 지시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지성"의 "지극함"을 또다시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인상언어에서도 "천하에" 운운하면 최상급의 강조형태가 된다.
여기 논리적 구조는 매우 간결하다. 최초의 "기성"의 "기"는 "자기"를 가리킬 수밖에 없다. 주희는 그것을 "성인"에 국한하여 말하나, 자사가 그것을 꼭 성인에게 국한하여 썼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인은 타자가 아니라, 즉 자이다. 항상 범인 속에서 들어있는 것이다. 주자의 언어는 너무 "성인"이 외재화되어 있다. 자사의 궁극적 목표는 항상 범인의 성인 됨의 가능성을 자각케 하고 격려케 하기 위한 것이다. 자가의 성에서 타인의 성으로, 타인의 성에게 물의 성으로, 물의 성에서 천지의 화육으로, 천지의 화육에서 천지와 인간의 합일로 나아가는 이 전체 논리구조의 핵심은 인간과 인간사회와 전지 대자연과의 에코시스템적인 일체감이다. 인간의 존재의 성의 발휘가 자기 개인이나 인간문명만을 확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과의 유기체론적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찬찬지지화육"의 "찬" 즉 "돕는다"라는 말에 도가 사상가들은 코웃음을 칠 것이다. 아니 그 위험성을 경고할 것이다. "미친 자식들! 자연은 내버려 둘수록 좋은 것이다. 어떻게 너희 인간이 전지의 화육을 돕는단 말까! 천지의 화육을 돕는다고 나대는 놈들이야말로 천지의 화육을 망가뜨리는 주범들이다! 천지는 스스로 그러한 것이니 인간의 개입이 없을수록 좋은 것이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다. 과거에는 도가의 사상이 유가에 대한 반발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오히려 여기 자사의 논의는 그러한 도가적 사유에 대한 유가적 디스텐스로서 발출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유가는 인간에게 "천지의 경영권"을 부여한다. 그 부여에 대해여 강렬한 책임의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유교적 인간은 어차피 문명 속의 인간이다. 공자는 말한다. "자연을 존중하고 세속을 피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나 그렇다고 내가 조수와 더불어 무리 지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이 인간의 무리와 더불어 하지 않는다면 과연 누구와 더불어 할까 보냐? 내가 인간의 무리와 더불어 하지 않는다면 과연 누구와 더불어 할까보냐" 인간을 대자연의 일부로 파악한다면, 인간이라는 주체가 소우주적인 주체라고 한다면, 이미 인간의 가능성은 천지의 가능성과 동일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주체의식의 심화, 즉 신독의 내면은 여기 우주론적 연대감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월자로 하나가 지각변동의 자연재해보다 수천만 배 더 큰 재앙을 몰고 올 수 있다는 목전의 현실은 이러한 자사의 명제를 보다 절실하게 우리 존재의 책임태로서 인식시킨다. 인간은 어차피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밖에 없는 문명의 원죄를 걺 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자사가 파악하는 인간이다! 공자의 인은 "기욕립이립인, 기욕달이달인"이라 하여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으나, 자사의 성론은 할아버지의 인의 사상을 만물의 "물권"에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제일 마지막 구문인 "여천 지삼"은 "인간이 하늘과 땅과 더불어 셋이 된다." 즉 삼위일체의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보통 풀지만, 나는 "여천지참"으로 보통 읽고 패석한다. 단지 셋이 된다는 것은 매가리가 없는 해석이다. "수"는 석 삼의 의미도 있지만, "참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동등한 자격으로서 앙가주망 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전지를 화육함으로써 천지를 자신의 실존의 앙가주망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인간을 하나님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과거 어느 시점에 창조한 것이 아니다. 결국 하나님이 창조라는 것은 이 천지라는 우주와 더불어 끊임없이 앙가주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에로의 참여자이며, 그 하나님의 궁극에는 인간의 성적인 자기 인식이 놓여있다.
혹자는 "수"을 "찬"의 가차로보아 "천지와 더불어 찬란하게 빛난다."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매가리 없는 주석이다. 이 장의 내용 역시 제1장의 언어와 동일한 심층구조를 가지고 있다. "추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이라는 명제를 부연설명한 것일 수도 있다.
"천하지성"이라는 것은 성인의 덕이 하도 리얼하여 천하의 어떠한 것도 더 보탤 것이 없도록 완벽하다는 뜻이다. "진기성"이라고 하는 것은 덕이 리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인욕의 사사로움이 전혀 없으니, 그 천명이 나라는 존재 내며에 들어와 ㅇㅆ는 것을 잘 살피고 실천하게 되면 거시적인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정교한 것이든 엉성한 것이든, 모두 호발이라도 다 발현치 아니 함이 없다는 뜻이다. 타인의 성이든 사물의 성이 든 그것이 결국 다 나의 성이다. 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다 평등한 것이지만 품부 받은 형기가 같지 아니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능진지"라고 하는 것은 앎에 밝지 못한 점이 있을 수가 없고, 처함에 부당한 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찬"이란 돕는다는 뜻이다. "여천 지삼"이란 하늘과 땅과 나란히 세워져서 셋이 된다는 뜻이다. 이 절은 윗장에서 말한 바 "자성명"의 측면을 상술한 것이다.
주희는 열한 장이 모두 제21장의 부연설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제21장에서 말하는 자성명을 천도라 했고, 자명성을 인도라 했다. 그래서 열두 장을 모두 천도냐? 인도냐?로 따져서 해설하고 있다. 그래서 이 경우는 천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희의 이해방식은 매도 도식적이고 체계적이다. 존경스러운 학인의 태도라 할 만하나 나 도올은 그러한 도식적 이해를 좋아하지 않는다. 주희는 책에서 천도와 인도가 계속하나 건너씩 배열된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