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물의 끝과 시작이다. 성하지 못하면 물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성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을 삶의 가장 귀한 덕으로 삼는다.]
자사의 우주는 파르메니데스적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해라클레이도스적인 생성의 세계이다. 서양에서는 플라톤이 헤라클레이도스를 버리고 파르메니데스를 계승하는 바람에 진정한 생성의 세계가 사라졌다. 생성의 세곌 변화하는 무가치한 허상으로 파악했고,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수용한 이후로는 그것은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암혹의 세계가 되고 말았다. 중용의 우주는 모든 존재를 생성으로만 파악한다. 로고스적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생성의 법칙을 자사는 성이라고 불렀다. 이 성은 우주의 법칙인 동시에 인간의 법칙이다. 종교적 진화의 궁극이란 우주의 법칙, 그 자체를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경지이다. 생물학자나 화학자나 물리학자가 바라보는 우주 그 자체를 신성으로서 외경화할 수 있는 경지가 곧 자사가 말하는 성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성이라는 글자는 회의겸형성자로서 그 속에는 연과 성이라는 요소가 들어있다. 성은 앞 절에서 말했듯이 생성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주체가 주체를 형성해 나가는 "스스로 그러함"의 세계이다.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에 섣부른 의미부여나 관념의 조작이 거부된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그 성의 세계는 인간의 언어와 밀착되어 있다. 천지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언어의 규정성을 거부할 수 없다. 노자는 언어를 부정한다. 그러나 노자의 언어부정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성의 세계를 성실하게 반영해야 한다. 따라서 성은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를 거부하는 자성의 우주, 모두를 포괄하는 시공연속체이다. 시간과 공간, 그 모두를 성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자는 물의 종시"라는 말이다. 시종을 말하지 않고 종시라 말한 것은 종이 곧 시라는 연속성을 내포한다. 모든 기의 종언은 새로운 시작이다. 따라서 불성이면 무물이라 한 것은 너무도 정당하다. 성이 없으면 물도 없다는 말은, 물이라는 모든 생성체를 성립시키고 있는 그 근원에 성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서은 이간의 언어적 시공성까지 다 포괄하는 것이다.
천하의 사물이라는 것이 모두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리의 소위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리를 얻은 연후에야 이 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물이 획득한 리가 그 기능을 다하게 되면, 사물 또한 그 기능을 다하게 되어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도 잠깐이라도 리얼리티의 법칙을 상실하면 그것이 지내는 사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성을 가장 귀한 것으로 삼는 것이다. 대저 사람의 마음이란 리얼하지 안니 함이 없을 때만이 그 함이 스스로 이룸이 있는 것이요, 또한 도가 나에게 있어서 스스로 행하지 아니 함이 없을 것이다.
[성이라는 것은 인간 스스로 자기를 이룰 뿐 아니라 동시에 반드시 자기 밖의 모든 물을 이루어 줌으로써 구현되는 것이다. 자기를 이룸을 인이라 하고, 나 이와의 사물을 아룸이 자리한다. 인과 지는 인간의 성이 축척하여 가는 탁월한 덕성이며, 인간존재의 외와 내를 포섭하고 융합하는 도이다. 그러므로 성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여지더라도 반드시 그 사물의 마땅함을 얻는다.]
"물"이란 나의 존재 이외의 사건이안 물체나 사람, 그 모든 시공의 이벤트를 가리킨다. "성기:라는 종적 관계는 동시에 "성물"이라는 횡적 관계를 포섭한다. 자기를 이루는 것은 이이다. 인이란 존재의 감수성이다. 존재의 감수성이란 그 존재의 씨앗이 자라나는 모든 교섭의 생명성이다. 물을 이루는 것은 지이다. 나의 존재는 일차적으로 나의 인한 느낌으로 파악되고 교섭되지만, 타물의 존재는 개념적 인식을 요구한다. 개념적 인식 즉 지를 통해 타물은 나의 존재는 개념적 인식을 요구한다. 개념적 인식 즉 지를 통해 타물은 나의 존재로 감입된다. 인과 지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한다. 성은 인과 지를 포섭하는 본성의 덕성이다. 그것은 내외를 융합시키는 도이며, 모든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는 시중성이다.
정현은 "시조"해석하여 "그때를 얻어 씀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시중"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합외내지도"가 합내외지도"로 되어 있다.
지는 거성이다. 성은 미록 자기 글 이루는 것이지만 일단 자기를 스스로 이루어 가게 되면 자연히 타물에게도 미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렇게 되면 도가 타물에게도 널리 행하여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이라는 것은 체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며, "지"라는 것은 용을 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양자는 모두 내 본성에 고유한 것이며 따라서 내 존재 안이다. 빵이다 하는 구분이 근본적으로 없는 것이다. 존재 내의 형성은 곧 존재 밖의 형성과 일치하는 상호교섭작용이다. 성이 일단 나의 존재 내부에서 획득되면, 그것이 존재 밖의 이벤트에서 드러나게 될 때는 어떠한 상황에 처하여지더라도 반드시 모두 마땅함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은 쉼이 없다.]
지극한 성은 쉼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느끼는 온 생명적 우주가 일순간도 쉬지 않는 것과 같다. 불변도 없다. 부동도 없다. 일순간의 쉼도 없이 끊임없는 창조를 계속하는 그 우주의 생멸력을 자사는 성이라 부른 것이다. 따라서 중용의 하느님은 끊임없이 창조하시는 하느님이며, 쉼이 없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그 하느님의 구현체인 사람이라는 하느님도 쉼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잠도 쉼이 아니요, 죽음조차도 쉼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창조의 계기일 뿐이다.
성이란 진실무망한 것이며, 따라서 우주의 실상이며 일체의 허구성이나 가현성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히 단절의 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쉼이 없으면 오래가고, 오래가면 징험이 드러난다.]
서구인들의 사유의 가장 큰 병폐는 현실적으로 실현불가능한 관념적 가치를 이데아로 삼는다는 것이다. 성의 우주에서는 변하지 않고 화하지 않은 것도 없다. 따라서 불변은 있을 수 없다. 불변은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약속의 체계들이다. 우리의 생명의 자인 나의 몸과 우주의 어떠한 것도 불변의 대상은 없다.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 속에서 우리가 가치의 준거로 삼을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모든 것이 순간순간 다 변화한다면 존재의 안위가 될 만한 정박처가 없지 아니 한가? 여기에 답변하는 것이 "오래 감"이다. "오래 감" 즉, "구" 불변이 아닌 지구성이다. "구"에 관한 논의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지구성이란 우리 존재의 준거이다. 지구성만 확보되어도 우리 존재이 모든 가치 준거가 마련될 수 있다. 지구성 속에는 변과 불변이 이원적으로 분열을 일으키지 않는다. 지구성이란 변화의 지속태이기 때문이다 구를 추구하지 아니하고 불변을 추구하기에 천당을 추구하고 관념적 실재를 추구하고 물자체를 초월적 실재로서 남겨놓았다.
그러나 구는 변화 속에서 그 온건한 시중성을 유지한다. 동방인들이 말하는 "상"이란 "구"의 다른 표현이다. 항상성이 곧 불변성은 아니다.
"징"이란 오래 쌍인 덕성의 효험이 밖으로 표출되어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말한다. 지속성이 보장되면 그것은 성의 확실한 징표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