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서부터 명으로 구현되어 나아가는 것을 성이라 일컫고, 명에서부터 성으로 구현되어 나아가는 것을 교라고 일컫는다. 성하면 명해지고, 명하면 곧 성해진다.]
중용이 성론에 관해서는 우리의 심오한 사유를 요구할 뿐, 번쇄한 출전과의 관련을 요구하지 않는다. 성론이란 오로지 지사라는 사상가의 독창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관련된 출전은 대부분 그의 영향하에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그 영향하에서 생겨난 문헌을 가지고 자사를 이해하게 되면 자사의 상상을 축소시키고 범주화시키고 형해화시킬 뿐, 그의 웅혼한 사유를 총체적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사실 자사가 "성"을 집중적으로 논의한 것은 중용 전체에서도 일부분이다. 우리는 고도의 상상력과 치열한 논리를 가지고 접근해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 한 사람의 해설에 이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중용은 천만인 독차가 있을 때, 천만 갈래의 다양한 해석을 제시할 뿐이다.
우선 "자성명"은 "성으로부터 밝아지고"라고 번역하고, "자명성"은 "명으로부터 성실해지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단순하고 명료하다. 그러나 "밝아진다"를 나는 "명으로 구현되어 나아간다."라고 번역하였고, "성실해진다"는 "성으로 구현되어 나아간다"라고 번역하였다. "자성명, 위지성"에 대한 플라크스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When one`s path of cultivation proceeds from integral wholeness to conscious understanding, this can be attibuted to the predisposition of inborn nature" 어차피 성과 명사이면서 동시에 형용사이다. 그러나 자사의 사유체계에 있어서는 성과 명이 개념화되어 있다. 그리고 언어가 동일저자에 의하여 쓰인 것이라면 이 양자는 분명히 상호 관련적 심층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성과 교를 명료하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의 레게 번역은 다음과 같다.
when we have intelligence resulting from sincerity, this condition is to be ascribed to nature, when we have sincerity reulting from intlligence, this condition is to be ascribed to instruction. But give the sincerity be the intlligence given the intelligence, and there shall be sincerity
상당히 정중한 번역이라고 생각되지만 플라크스의 번역이 더 내면적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어차피 영역은 시니피에 지시범위가 너무 달라 그 뜻을 충분히 전달키 어렵다. "성"이라는 것은 본체론적 의미로서 천지에 내장되어 있는 천리와 같은 것이라는 맥락은 이미 충분히 설파되어 왔다. 물자체를 칸트는 불가지의 대상으로 남겨놓았지만, 자사는 그것을 성으로 보았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헤겔에 잇어서는 자사의 성은 "절대성신"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절대정신도 절대인 이상, 절대밖에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으며, 도 그것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 변화하는 생명적 현성을 다 포괄한다. 절대정신은 추상적인 실체가 아니라 "살고 있는 실체"이다. 헤켈이 절대자를 나타낸 "가이스트"라는 독일어는 "정신"인 동시에 그것은 중용이 말하는 "귀신"의 뜻도 포함하고 있다. 존재라로서의 귀신 아닌, 형용사적 귀신, 그리고 우주만물 전체에 편재해 있는 귀산, 그 귀신을 헤켈은 "가이스트"라 표현했고, 자사는 "성"이라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 "명"이라는 표현은 성이 본체적 의미가 강하다고 한다면 현상적 의미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명"을 보통 현대어에서 "문명"과 관련짓는 것도 일리가 있다. 문명은 미개의 어둠에 대하여 밝음을 의미하고, 자연의 카오스에 대하여 인위적 질서의 코스모스를 의미한다. "명"의 인간은, 문명 속의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희로애락이 이미 발현된 기발의 인간이며, 또 언어 속으로 들어와 버린 인간이다. "명"은 인간의 언어와 관련을 떠날 수 없다. 명을 레게는 "intelligence"라고 번역했고 찬 "enlightenment"라고 번역했는데 모두가 언어적 사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사는 성과 명을 어둠과 밝음이라는 이원론적 구분 속에서 논하고 있질 않다. 플라토니즘이나 요한복음의 세계관은 이 문명세계, 코스모스를 어둠으로 보고 로고스의 세계를 밝음으로 본다. 그러나 자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세계, 언어세계를 명으로 파악하며 그와 짝지원지는 본체적 세계를 "어둠"이라 생각지 않고 오히려 "성"이라고만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그 본체적인 성으로부터 인간이 "밝음"을 획득하는 과정을 "성"이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천지의 성으로부터 밝음을 획득하는 과정이라는 말은 "천지위성"이라는 대명제와 쉽게 연관될 수 있다.
인간은 명의 인간으로서, 즉 언어 속에 거주하는 현실적 인간태로서 바라볼 때, 그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의 본래적 천지의 성을 회복해야 한다. 회복이란, 현실적 인간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 인간 그 자체가 절대정신의 구현체이므로 그 현실적 인간의 긍정을 통하여 천지의 절대정신인 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에서 성으로 끊임없디 지향하는 것이 인간의 교육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헤겔의 변증법과는 매우 다르다. 헤겔의 변증법은 역시 종말론적 사유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합목적적 역사진행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사에게는 일체 그러한 목적론이 없다. 성과 명은 결국 모두 긍정이 대상이지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부정의 부정"을 통한 지양의 방향성이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이다. 쌍방향의 순환 속에서는 목적론이 성립할 수 없다. 그래서 성은 곧 명이요, 명은 곧 성이라고 말한 것이다. 성과 명은 궁극적으로 도의 심미적 시공연속체 속에서 상호교섭인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성은 본성적 실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