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은 사전에 미리 성실한 바탕 위에서 단속하면 확고하게 서고, 미리 단속함이 없이 무방비 상태로 임하면 낭패를 봅니다. 인간의 언어는 미리 잘 생각해 놓으면 차질이 없고, 일도 미리 잘 준비해 놓으면 곤혹스럽지 아니하고, 행동도 미리 방침을 잘 세워놓으면 병폐가 없습니다. 도야말로 미리 갈 곳을 잘 정해놓으면 샛길로 빠져 막다른 골목에 부닥치는 그런 궁색한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범사는 앞에서 말한 달도, 달덕, 구경 전체를 받은 말이라는 주희의 해석은 옳다. "예"와 "전정"은 같은 뜻이다. "예"에 관해서는 예기 학기에 재미있는 용례가 있다. "대학의 교육방법에 있어서, 학생들이 오류를 범하기 전에 사전에 조여 금지시키는 것을 예라고 일컫는다." 여기 예라는 것은 범사를 그것이 발견되기 이전에 성의 바탕 위에서 확고하게 방향 지우는 것을 말한다. "미리 함"이라는 성실한 삶의 자세를 말하면서 성이라는 주제를 자연스럽게 도출해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주제는 언, 사, 행이다. 언도 성의 기반 위에 확실히 서야 한다. 사도 성의 틀 속에서 진행되어야 하며, 행도 성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의 언어에 관해 여기 언급된 "겁"이라는 단어는 라캉의 "미끄러짐"이라는 용어를 연상시킨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불안정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혹자는 도를 언, 사, 행과 같은 차원에서 병립시키지만, 나는 도를 언, 사, 행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보았다. 도는 역시 "길"이라는 의미와 항상 중첩되어 있다. 따라서 "궁"이란 길이 막힌다는 뜻이다. 우리가 어디를 갈 때, 사전에 길을 다 알아두면 궁색해질 일이 없다. 다양한 루트를 통해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달하는 천변만화의 묘용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릴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는 것은 방법이 있으니, 먼저 친구들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면 윗사람에게 당연히 신임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신임을 받는 것은 방법이 있으니, 먼저 부모님께 효순 하지 못하면 친구들에게도 당연히 신임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효순 하는 것은 방법이 있으니, 자기 몸에 돌이켜보아 성실하지 못하면 부모님께도 당연히 효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성실하게 하는 것은 방법이 있으니, 선을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몸을 성실하게 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심상경주소보 예기에는 중용이라는 편이 여기를 기준으로 나눠어 진다. 그러나 이러한 분권은 단순 분량에 따른 임의적인 것이며, 전혀 의미가 없다. 가어에는 공자의 말씀자료로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주희가 20장을 나누지 않고 통째로 하나의 연속체로 본 것은 매우 정당하다.
그런데 특기할 사실은 여기 내용이 거의 동일한 형태로 맹자의 말씀자료로서 이루상 12에 실려있다는 것이다. 주희는 공자의 말씀을 자사가 증자에게서 들었고, 또 그것이 자사를 통하여 맹자에게 전수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맹자가 자사의 20장 내용을 전수 밭아 기술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맹자라는 서물 속에서 거의 성론에 대해 체계적 노출이 없으며 이루 상 12의 언어는 전후맥락으로 볼 때 전혀 생뚱맞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순자의 경우에는 불구 편 속에 자사의 성론을 자기 나름대로 소화시켜 체계적으로 색다르게 전개시킨 담론이 나오고 있다. 맹자는 전혀 그러한 담론의 맥락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동일 로기온자료가 가어와 중용과 맹자에게 각기 다른 맥락에서 편집되어 나타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는 앞으로 보다 정교한 문헌비평의 방법론을 요하는 과제상활일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재하 위, 불확호상" 운운하는 말이 뛰쳐나왔을까? 앞 절에서 "범죄예즉립"이라 했으므로 의미의 맥락상 "재하 위" 운운한 것은 "예"라는 개념과 상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옛 성현들은 매우 철학적인 고담준론이라도 매우 일상적인 프래그마의 맥락 속에서 풀이하는 것을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재하 위"라는 것을 반드시 "하급관료"라는 의미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매우 특수한 한두 명의 인간을 빼놓고는 하위적 존재이다. 이 하위적 존재의 현실태에서 가장 중요한 프래그마틱한 과제는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획득하는 일이다. 유교적 과제는 수신의 내면적 덕성을 사회화시키는 작업이 중요하다. 따라서 윗사람으로부터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얻어 다스릴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가치가 시회화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 하위자와 상위자의 관계는 "미리함"의 덕성이 실현되어야 할 관계라고 파악한 것이다. 하위자는 상위자를 대함에 미리 언, 사, 행을 정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이 상위자의 신임을 획득하는 과제상황으로부터 그 방법은 상위자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로부터 보다 가까운 관계로 그 신임의 핵심을 비근화 시켜 나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미리함"즉 "전정"은 상위자로부터 친구로, 친구로부터 어버이로, 어버이로부터 자기 몸으로 내면화도어 간다. 그리고 "자기 몸" 속에서 드디어 "성"을 발견하게 되고 또 "선"의 본질을 밝혀나가게 되는 것이다. 순자의 권학 편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은 한번 살펴보자!
"한 줌의 흙이 쌓이고 큰 산을 이루게 되면 그곳에는 자연스럽게 바람과 비가 일게 된다. 그리고 그 산 중에 작은 물이 고이고 또 고이어 하나의 깊은 못을 이루게 되면 이무기와 용이 살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에도 선이 쌓이고 쌓이어 큰 덕을 이루게 되면 신령스러운 영명함이 스스로 깃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성스러운 마음이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쉬지 않고 노력하는 인간의 후천적 배움의 과정에 대한 격려의 언사일 수도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기나긴 생명의 진화의 결과물로서 생긴 인간존재에 관한 매우 통찰력 있는 선천적 규정일 수도 있다. 절대적 하느님의 신성을 통하여 인간의 현실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속에 응축된 시간의 공시성을 통하여 신성 그 자체를 규정하는 메시지일 수도 있다. 흙은 진화과정에서 암석층으로부터 매우 어럽게 조금씩 형성된 것이다. 그것이 모여 거대한 산을 이루고 못을 형성하여 장엄한 생명의 심포니를 만든 것은 그 40억 년의 시간의 응축을 요구하는 사건이었다. 그 시간의 최종의 순간에 인간이 태어난 것이다. 생명이 탄생하기 어려운 사막과 같은 조건 속에서 그 가시적인 환경 그 자체를 거룩하고 신비로운 신성으로 파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 아닌 죽음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신성을 사유하기가 어렵다.
해양동물들은 출현했지만 육상생물이 없었던 캄브리아기의 너무도 고요한, 바람에 실려 우짖는 소리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해변가에 서서 하느님을 찬양하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산천초목이 우거지고 개울물이 고이고 고여 거대한 못을 이루고 교룡이 꿈틀거리는 울창한 대자연에서 비로소 우리는 존재를 넘서는 신적 경지를 느끼게 된다. 나무가 한 그루만 있는 민둥산을 신비롭게 바라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산에 억만 그루의 나무가 모여 숲과 계곡을 이루고 운무가 서리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인과적 분석을 초월하는 총체적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숲은 나무의 총화 이상의 것이라는 이야기는 신성에 관한 매우 리얼한 기초적 명제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나라 민화에 산신령이 반드시 나무지팡이와 호랑이와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은, 최소한 산신령이 존재하려면 호랑이가 살 수 있을 정도의 울창한 숲의 에코시스템이 작도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각박한 환경의 중동문명권에 사는 사람들은 가시적인 코스모스를 부정하고 가사적인 코스모스를 초월적으로 상정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러한 사막문명권에서는 인간의 "몸"을 사막과도 같은 죽음의 운명체로서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아시스를 갈망하는 욕망의 덩어리로만 규정했다. 그러나 실상 인간의 "몸"은 사마가 같은 특수조건이 아니면 생명의 진화의 모든 가능성을 압축한 것이다. 그래서 순자는 인간의 몸이야말로 교룡이 꿈틀거리는 것과도 같은 대자연의 신성의 마당이며 신명과 성심이 구비된 천지진화의 최종산물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몸에 돌이켜보아, 몸속에서 "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너무도 지당한 명제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천지의 성을 구비한 신성의 압축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