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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장구

글공작소주인 2025. 6. 26. 05:33

사람의 임금 된 자는 인을 구현해야 하며, 사람의 신하 된 자는 경을 구현해야 하며, 사람의 아들 된 자는 효를 구현해야 하며, 사람의 아비 된 자를 구현해야 하며, 국인들과 교제할 때에는 신을 구현해야 한다. 이 대학의 표현도 중용의 달도와는 다르다.

 

여기 "천하지달도오, 소이행지자삼"이라는 표현에 있어서 오달도와 삼달덕의 관계를 "길"과 "감"이라는 글자로 나타낸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감"이라고 길을 가는 것이다. 즉 그 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소이행지자"이므로 그것은 "그 도를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적 덕성이다. 이 세 달덕, 즉 인간에게 구유 된 보편적 덕성이야말로 다섯 달도의 관계를 실현케 해주는 덕목이다. 그러니까 맹자가 친, 의, 별, 서, 신이라 하여 다섯 인륜의 덕목을 그 자체 내의 고정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과는 너무나 다른 설법이다. 부자유친 하고, 군신유의 하고, 부부유별하고, 장유유서 하고, 붕우유신해야만 하는 인간관계의 덕목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군신, 부자, 부부, 곤제, 붕우라는 인간의 곤계그물망의 윤리를 내면적 덕성이라는 것이다. 공자는 오륜을 말한 적이 없다. 단지 자신의 생애의 이상적 목표를 가리켜, "늙은이들을 편안하게 해 주고, 친구들에게 믿음을 주고, 젊은이들을 품어주는 그런 따뜻한 인간이 되고 싶다"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공자는 자공과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의 도에 세 가지가 있으나 나는 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인자는 근심하지 않고, 지자는 미혹하지 아니하고, 용자는 두려워하지 아니한다."자공이 이에 말하였다. "우리 부자께서 스스로 낮추어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 가장 해석하기 애매한 구분은 제일 마지막에 있는 "소이행지자일야"라는 표현이다. 여기 "소이행지자"는 제일 앞에 있는 구분인 "소이행지자삼"에서 "삼"을 밴 것과 동일하다. "그도를 실천케 하는 것이 셋이 있다"라고 말하고 그것을 천하의 달덕으로서의 지, 인, 용이라 말한 후에 "그 도를 실천케 하는 것이 하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매우 어색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의 "일야"에서 "일"을 연문으로서 빼내버리면, "소이행지자야"가 되므로, 단순한 반복의 마무리구가 되어 별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텍스트를 해석이 안된다고 함부로 뜯어고치는 것은 주석가의 고질일 뿐이다. 더구나 다음 절에 "일야"라는 용법이 두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뒤에 "구경"을 운운하는 데서도 다시 나오고 있다. 따라서 "소이행 자지일야"는 "도를 실천케 만드는 세 달덕은 결국 하나입니다."라는 식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하나"는 무엇일까? 우선 그 "하나"는 미혹함이 없는 지와 근심함이 없는 인과 두려움이 없는 용을 하나로 묶는 그 무엇이어야 할 것이다. 공자-자사는 이 "하나"를 무엇이라고 규정치는 않았지만 이 "하나"야말로 다음에 등장하는 성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주희를 비롯한 주석가들은 견해를 모은다. 나 역시 이에 찬동한다. 우리는 앞 절에서 말한 수신-사친-지인-지천의 추상성이 증가해 가는 어법의 디프 스트럭쳐와 오달도에서 삼달덕으로 , 삼달덕에서 일야의 성으로 진해하는 사유의 방식이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미요한 언어배열에 중용이라는 텍스트의 무궁무진한 해석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성은 긍극적으로 천지의 덕성이지만 그것이 결국 가치이고 보면, 이러한 인간적 가치로부터 추출된 것이라는 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희는 맹학의 후예일지언정, 자사의 적통이라고까지 말하기는 힘들다.

 

[여태까지 이야기하여오 달도와 달덕에 관하여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그것을 알고, 어떤 사람은 배워서 그것을 알고, 어떤 사람은 곤요롭게 애써서 그것을 압니다. 그러한 지력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결국 앎에 도달하게 되면 안다고 하는 거 사실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또 달도와 달덕에 관하여 어떤 사람은 편안하게 그것을 행하고, 어떤 사람은 이해를 따져서 그것을 행하고, 어떤 사람은 억지로 힘써 그것을 행합니다. 그러나 결국 공을 이루게 되면 그 행위의 성취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 "지지", "행지"의 "지"는 분명한 대상을 갖는 지시대명사이므로 해석상 우리는 그 대상을 분명히 지시하여야 한다. 그런데 주흐는 그 "지"를 "달도"라고 확정적으로 지목하고 지와 행, 그리고 생지, 학지, 곤지, 안행, 이행, 면행을 달덕의 카테고리에 따라 분류하려는 시도를 한다. 생지와 안행은 지에 속하고, 학지와 이행은 인에 속하고, 곤지와 면행은 용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것은 명백한 "지시"의 오류일 뿐 아니라, 평범한 문장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여 부질없는 범주적 논의를 일으키는 어리석은 도화의 병폐일 뿐이다. 나는 일체 이러한 터무니없는 논의에 휘말릴 생각이 없다. 

 

우선 논리의 전체적 흐름상으로 볼 때 "지"는 이 절 이전에 말한 것, 즉 달도와 달덕 그 전체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주희는 달도와 달덕의 "달"의 의미를 단순히 "누구에게나 공통된 것"이라는 맥락에서만 해석하고, "달성되어야 할 이데아적 측면"을 읽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도와 덕의 관계를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여기 달도와 달덕의 관계는 근원적인 세계관을 달리하기는 하지만 노자가 말하는 도와 덕의 문제와 비슷한 사유패턴을 과시하고 있다. 도는 근원적인 인간관계만을 말한 것이다. 거기에는 덕의 규정성이 없다. 따라서 그것만으로 지, 행, 용은 덕의 가치이다. 따라서 인간의 지행의 대상은 달도와 달덕이 같이 노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지행의 대상이 달도만에 한정되고, 지력의 차이나 실천의 단계적 경지의 차이에 달덕이 분별적으로 적용된단 말인가? 지, 인, 용은 여기 지행의 바탕에 깔려 있는 목표적 대상이지 그것으로써 지행의 과정을 분류하는 방법론이 될 수가 없다. 주희는 목적과 수단을 근원적으로 혼동하고 있다. 그의 논리의 범론적 진행이 때로는 치열하게 보이지만 때로는 터무니없이 유치해지고 마는 것이다. 

 

여기 공자-자사는 달도와 달덕을 지와 행의 두 측면에서 논의하고 있는데, 문제의 핵심은 생지, 학지, 곤지의 인식능력적 차별이나 안행, 리행, 면행의 실천경지적 차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차별이나 차등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지행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하는 격려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갈려 이는 위대한 사상은 인간은 선천적 지력이나 선천적 행위의 감수성 양식의 차별과 관계없이 "일상적 노력"의 유무에 의하여 파악하는 중용적 인간관, 즉 보편주의적 인간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