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과 사친과 지인과 지천
군자는 자기 몸을 닦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몸을 닦을 것을 생각하면 어버이를 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버이를 섬길 것을 생각하면 사람을 알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을 알 것을 생각하면 하느님을 알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중용 전체 문장 중에서 가장 위대한 명제를 담고 있는 메시지 중의 하나로 꼽는 명언이다. 결국 수신과 효에서 성론을 끌어내기 위한 다리역할을 하고 있다. 수신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신독의 차원에서의 주체의 심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관계의 횡적 연대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 최초의 계기가 가장 가까운 혈육을 섬기는 효의 마음이며, 그 효는 외재적 권력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인간의 본연적 생명력에서 발출되는 인의 감정이다. 그러나 이 사친은 가족주의적 관계를 넘어 인간이라는 보편자의 앎에 도달해야 한다. "지인의 지"이란 타인인 동시에 인간 보편이다. 그러나 중용은 또다시 인간중심주의의 제약 속에 갇히지 않는다. 인간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근본인 하늘 곧 하느님을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 밖에 있지 아니하며 인간을 아는 그 궁극에 하느님에 대한 앎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인간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다. 역으로 인간의 앎 자체가 하느님의 앎을 통하여 확산되는 계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념적 영성이 간주관적, 인간적 소통에 의하여 인간 보편에 도달하고, 인간 보편을 통하여 다시 하느님에게로 확대되는 것이다. 여기 꾸준한 외연의 확대가 있으며 그 문자들은 아름다운 운을 밟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을 통하여 인간을 바라보는 인간을 규정하고자 하는 유대-기독교적인 하구성과는 달리 신, 친, 인, 천을 하나의 여속체로 파악하는 독특한 신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연속체 전체를 일관하는 하나의 추상적 가치개념이 바로 성인 것이다. 여기 불가이불, 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은 곧 수신은 지천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필연적 연속성을 확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용의 수신-사친-지인-지천의 확대과정은 대학의 수신-제가-치국-평청하의 과정보다 훨씬 더 본원적이며, 더 추상적이며, 덜 정치적인, 덜 공간적이며, 더 인간적이다. 자사철학의 심오한 실존성과 근원성으로 잘 말해주고 있다. 지천을 통하여 지인하는 것이 아니라 지인을 통하여 지천한다는 중용의 사상은 인간의 신존성과 종교성을 통하여 새로운 우주론적 지평이다.
이 절의 시작인 구군자가 가어에는 시이군자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앞에 예지, 정지본야라는 구문이 있다. 그러나 이 구문은 원래 있었던 것일지는 모르지만 문맥상 그리 중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주제의 흐름을 매가리 없게 만드는 불필요한 중언부언이다. 그래서 자사가 과감하게 쳐내었을 것이다.
그리고 논어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나고 있는데 이 절의 내용과 관련하여 한번 되씹어볼 만하다.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으며, 예를 알지 못하면 설 수가 없으며, 언을 분변치 못하면 사람을 알 길이 없다."
"위정재인, 취인이신"이라고 했으니까 여기서 "그러므로 군자는 자기 몸을 닦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수신이도, 수도이인"이라고 했으므로 여기서 그러므로 "자기 몸을 닦을 것을 생각하면 어버이를 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친친의 인을 다 실현하려고 하면 반드시 존현의 의를 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반드시 사람을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또 친친지쇄나 존현지등이 모두 천리일 수밖에 없으므로 결국 하느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주희의 해석은 치밀한 면도 있으나 좀 옹졸하다. 문맥에 치여 신-친-인-천의 근원적 확대과정을 잘 파악하고 있질 못하다. "지천"의 "천"을 "천리"라고 하는 리기론적 개념에 구속시킬 수는 없다.
[천하사람들이 달성해야만 하는 공통되는 길이 다섯이 있고, 또 그 길을 행하게 만드는 인간 내면의 덕성은 셋이 있습니다. 다섯이란 임금과 신하 사이의 길이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길이요, 남편과 부인 사이의 길이요, 형과 통생 사이의 길이요, 붕우 간의 사귐의 길입니다. 이 다섯 가지야말로 천하사람들이 모두의 달도입니다. 그리고 지와 인과 용, 이세가지야말로 천하사람 모두의 달덕입니다. 그런데 도를 행하게 만드는 이 세 가지 달덕이야말로 결국은 하나로 수렴되는 것이지요.]
가어에도 이것은 계속되는 공자의 말씀으로서 연이어 수록되어 있다. "소이행지자삼"이 "기소이행지자삼"으로 되어 있을 뿐 여타는 동일하다. 갑자기 어조가 바뀌어 "오달도". "삼달덕"이 튀어나오듯 하지만, 이것은 실상 앞서 말한 수신의 주제를 인간관계의 횡적 지평 위에서 구체적으로 설파한 것이다. "천하"란 본시 인간사회를 가리키는 말이며, "천하의 모든 사람"을 지칭한다. "달도"라는 말에는 천하사람들 모두에게 공통된 길이라고 하는 보편성의 의미와 함께 모두가 달성해야 할 길이라고 하는 지향점의 의미가 같이 들어있다. 공통된 강의라고 하는 하나의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은 천박한 해석이다. 이 "천하지달도"는 "화"라는 개념과 관련지어 나왔다. 그러니까 여기 다섯 가지 달도는 "화"의 문제인 것이다. "화"의 문제는 단순히 공통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달성되어야 할 지향성의 가치이다.
"곤제"의 "곤"은 형이라는 의미이므로 "형제"와 동일하다. 주희는 이 오달도의 출전을 서경, 순전에 나오는 "오전"이라는 말에서 찾고 있으나 실상 "오전"이 무엇인지는 성경은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지 않다. 이 "오전"과 관련된 듯이 보이는 순임금의 "오교"가 좌천 문공 18년조에 나오는데 그것은 "아비는 의롭고, 어미는 자애로우며, 형은 우애를 베풀고, 동생은 공순하며, 아들은 효도를 한다."로 되어 있어 여기의 도달도와 항목이 다르다. 그리고 중용은 순수한 관계만을 이야기하는데 좌전이나 여타문헌은 그 관계의 덕목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맹자의 동문공상 4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성인이 이를 근심하시어 설로 하여금 사도를 삼으사 인륜을 가르치게 하셨으니, 부자간에 친함이 있게 되었고, 군신 간에 의로움이 있게 되었고, 부부간에 처별이 있게 되었고, 장유 간에 서열이 있게 되었고, 붕우 간에 믿음이 이게 되었다." 보통의 우리가 말하는 오륜의 모델은 바로 이 맹자의 등문공의 구절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며, 중용의 달도는 이러한 오륜개념 이전의 것이다. 그리고 특기할 사실은 "오륜"이라는 말 자체는 중국역사에 있어 명나라 이전을 거슬러 오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희도 "인륜"이라는 말을 섰을 뿐 "오륜"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 "오륜"이라는 용어는 명나라의 심역이라는 사람이 동몽에게 오륜의 도를 가르치기 위해 편찬한 "오륜시"가 그 최초의 용례이며 명나라 선종의 어찬인 "오륜서"가 정통 12년에 상재되어 천하에 반포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선진유가사상에 있어 "삼강오륜"이라는 식의 고착된 윤리관념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