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사마천의 언급, 중용은 자사작이다.

글공작소주인 2025. 6. 22. 23:06

이제 대강 독자들은 중용이라는 텍스트를 접근해 들어가는 시각의 대강을 파악했을 것이다. 이제 텍스트 그 자체의 비평에 관한 이야기를 거쳐 본문으로 진입하는 수고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중용은 누가 언제 쓴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란 참으로 쉽고도 어렵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사서라는 책, 그 편집체계는 이정을 거쳐 주희에게서 집대성된 것인데, 그중에서 중용은 유일하게 한 사람에 의한 단일저작으로 예부터 인지되어 왔다. 논어는 기본적으로 공자의 말을 모은 책이라고 하지만, 공자 이외의 제자들의 말이나, 제자들끼리의 말, 그리고 공자의 언행록과 무관한 기사도 들어가 있는 잡다한 성격의 것으로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편집되면서 서서히 형성된 것이다. 맹자도 사마천 사기의 맹자순경열전에 의하면, 맹가가 천하를 주유하면서 삼대의 덕정을 논술하였지만 현실정치와 뜻이 부합되지 않아 결국 말년에는 고국인 추나라에 돌아가 애제자 만장, 공손추등과 함께 자신의 소회를 편술에 의탁하였다고 하지만, 오늘날 맹자의 문체를 엄밀히 검토해 보면 그 전체가 맹자 당대에 이루어진 맹자의 자작이라고 당정 짓기는 어렵다. 분명 그 모체는 있을 것이지만, 상당 부분이 맹자의 사후에 그 문도들에 의하여 편수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학이라는 문헌은 가장 알쏭달쏭한 것으로 중자가 공자가 말한 것을 진술한 경의 부분과 그 경에 대하여 증자가 해설한 것을 증자의 문인들이 기록한 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억지춘향의 설을 주희가 펴는 바람에 증자의 작으로 이야기되고 있으나 그 설은 신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학은 진시황의 육국통일의 꿈이 무르익어가던 전국 최말기에 성립한 작품으로 간주된다 그 집필시기는 대가 여씨춘추의 성립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중용의 경우에는 사마천의 권위를 자랑하는 저작인 사기 공자세가 말미에 공자의 가족관계와 족보를 언급하는 자리에서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확고한 멘트를 남겨두고 있다.

 

"공자의 아들인 백어는 아들 급을 낳았는데 그의 자가 자사이다. 그는 62세까지 생을 누리었다. 일찍이 송나라에서 정치적으로 억류되어 고생한 적이 있다. 자사는 중용을 지었다."

 

백어는 공자의 맏아들로서 그 아명을 리라하는 사람이다. 공자가 본성해에 의하면 공자는 나의 열아홉 살 때 송 나라의 병관 씨의 딸과 결혼하여 스무 살 때 백어를 낳았다. 논어에 보면 공자가 아들 백어에게 시경을 가르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또 진항이라는 자가 백어가 아버지 공자에게 뭐 특별한 것이라도 배우는 것이 있나 하고 염탐하는 장면이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하여튼 공자는 아들 백어를 사항하고 또 친히 곡진한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이 50에 공자가 귀로 한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뜨고 만다.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하직하는 불효자식이 되고만 것이다. 공자는 학단 내에서도 자기 집안에 관계되는 것은 단출하게 행하는 모범을 보이느라 그랬는지 사랑하는 아들 백어에게 곽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초라한 장사를 치렀던 것이다.

 

자사의 탄생과 성장

 

공자보다 먼저 세상을 뜬 백어의 아들이 바로 급자사이다. 그런데 자사의 생몰연대에 관해서는 BC492~431과 BC483~402의 제2 설이 있다. 그러나 실상 어느 설도 확실한 준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2 설을 따르고 있으나, 그것은 백어가 50을 일기고 세상을 뜬 바로 그즈음에 자사가 태어났다는 얘기가 되는데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자사가 백어가 죽은 후에 유복자로서 태어 낫을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백어가 정치적인 사건으로 죽음을 당했다면 그러한 사건은 대사건이므로 반드시 기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백어는 질병으로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골골하면서 병상에서 부인에게 회잉케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더구나 자사는 맏아들이다. 그리고 더욱 이러한 가능성을 희박하게 만드는 사태는 백어는 자사의 엄마인 부인과 이혼했다는 사실이다. 백어가 죽은 후에 노나라 곡부를 떠나 위나라로 도망가서 곧바로 다시 시집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니 전후 아귀가 잘 들어맞지 않는다. 더구나 예기에 나오는 자사 기사를 보면, 자사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추억이 있다. 우선 다음 기사를 한번 보자

 

"자사의 어머니가 위나라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 소식이 자사에게 전달되었다. 그러자 자사는 공 씨의 사당에 들어가 곡을 했다. 그러자 자사의 문인들이 사당에 이르러 말하기를 서 씨 집안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어찌하여 공 씨의 사당에서 곡을 하십니까. 하니 자사가 말하기를 그래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하고는 결국 방을 옮겨 딴 곳에서 홀로 구슬피 울었다."

 

매우 소설 같은 이야기 일지는 모르겠으나, 나 자신 나이가 들어가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러한 예기 및 여타 경정이나 잡록의 기사들이 진지한 해석의 대상이 되어야지 치지도외할 문헌비평을 해대고 도 역사적 예수에 접근해 들어가는 실마리로 삼는 것에 비한다면 우리는 너무도 풍요로운 자료의 복고에 대하여 아예 상상력을 발동하지 않거나 빈곤한 문헌비평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상적 삶에 관한 자료에 대하여 철학적 해석을 가하지 않는 것이다. 단궁의 여러 기사로 미루어보면, 공자도 부인과 이혼하였고, 공자의 아들인 백어도 부인과 이혼하였고, 백어의 아들인 자사도 부인과 이혼하였다. 공자집안 3대가 다 이혼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유교라는 가정운리의 관계양상을 핵으로 하는 심오한 철한체계를 만든 사람들이 이렇게 그들의 사적 윤리체계에 파탄과 결손이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해하기 난감한 사태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 그러나 왜 예기의 편자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구차스럽게 경전 속에 편입시켰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