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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글공작소주인 2025. 6. 13. 21:30

과연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이것을 우리말로 풀면 이와 같다. "천이 명하는 것, 그것을 일컬어 성"이라 한다. 사실 가장 정직한 해석이란 이 풀이 이외로 아무것도 할 말이 없다. 여기서 성을 놓고, 본체니 본성이니 리니하는 따위이 외재적 규정성을 가지고 접근해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사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 사기일까. 일차적으로 성에 대해서 규정하는 문장을 앞에 놓고, 대뜸 그 본래의 규정성 이외의 개념을 가지고 거기에 덮어씌운다는 것은, 차돌을 앞에 놓고 금이라 우겨대는 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성은 무엇인가, 이 문장이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천이 명하는 것이다. 성은 천이 명하는 것이라고 하는 그 자체의 규정성을 떠나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아니 된다. 이 문장은 본시 "성, 천명야"라 해도 되는 문장이다. 그런데 "천명"을 앞에 놓고 "지위"를 도치시켜 가운데 끼워놓고, 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은 천이 명하는 것이라고 해놓더라도, 과연 "성"이 대상으로 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의 성일까? 나무의 성일까? 닭의 성이아닐까? 그것은 모른다. "천명지위성"이라는 말속에는 이 질문에 명료하게 답할 수 있는 단서가 주어져있질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이 중용이라는 책은 돌이나 닭의 독서를 위하여 쓴 책은 아니니까, 역시 여거서 말하는 "성"은 사람들의 성이 아닐까 그러나 돌이 독서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돌의 성을 우리가 말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이 중용은 얼마든지 돌의 성에 관하여 이야기한 책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중용이 말하는 성은 사람과 돌의 성을 무차별적으로 지칭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독자는 다짜고짜 당신 도울은 중용을 도가의 책을 보고 계시오라고 질문할 것이다. 글쎄올시다. 이러한 질문은 과거에는 매우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럴듯하다"는 말은 매우 논리적 근거가 정연하게 들어있다는 것을 의심한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정당치 못하다. 자사의 시대에 이미, 우리가 지금 도가적 사유니 유가적 사유니 하고 규정하는 것들은 혼융된 사유를 놓고 도가니 유가니 하는 후대의 규합개념을 들이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논의로부터 매우 중요한 하나의 사실을 천명할 수 있다. 이 중용은 매우 에포칼한 서물이다. "에포칼"하다는 말속에는 공문 유가 인문사상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최초의, 획기적인 논설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서양철학사에서 근대사상의 에코프를 테카르트의 "방법설설"에 나오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기점으로 해서 생각한다고 한다면, 여기에는 분명 생각의 주체로서의 "나", 인간인 나, 그러면서 동시에 개체적 존재로서의 나, 그 코키탄스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유학의 에포크를 이류는 최초의 논술적 명제인 "천명지위성"에는 그러한 개체적 인간이 전제되어 있질 않다는 사실이다. "성"은 분명 이차적으로 "인간의 성"을 대상으로 했음이 분명하겠지만, 그 "성"이 궁극적으로 인간성에 국한된다는 규정성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개체성이나 인간성의 특별성이 전제되어 있질 않은 것이다. 이 최초의 명제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왜 중용 제1장이 "천지위언, 만물육언"으로 끝나게 되는지를 이해할 길이 없어진다. 성에 대한 대상적 한정성은 여기 존재치 아니한다. 단지 "천명"이 성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성에 대한 논의는 뒤로 미루기로 하고, 그렇다면 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천명"을 분석해보자, "천명"은 "천이 명한다"는 주 및 술구조를  갖춘 하나의 온전한 문이다. "명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희의 주석대로 "명령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명령하다"는 뜻은 대체로 상명자가 있고 하복자가 있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에게 명령하는 것일까? 여기 명령의 주체는 매우 명료하다. 여기 명령은 군대의 상관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천이 내리는 것이다. 천이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이란 무엇인가? 아니 천이 누구인가? 하여튼 명령의 주체로서의 천에 대한 해석이 명료해지지 않는 한 이 문장은 료해될 길이 없다. 

우리는 이미 20세기 초부터 중국역사에서 갑골물이라는 방대한 역사적 문헌을 확보하는 행운을 획득했다. 이 은허에서 발굴된 대체적으로 지고의 신인 상제의 명령을 알아내어 그것을 대행하고자 은나라의 왕들이 복을 행한 기록의 소산이다. 인류학적으로 상고해보건대, 우리 인간이 언어를 개발하고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려 했을 때, 그 공동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어떤 구실체를 갈망했을 것이다. 질서가 없이는 공동체는 지속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구심체로서 인간을 세워놓으면 매우 불안정하다. 인간은 죽기도 하고 변덕스럽기도 하고, 또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일도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을 넘어서는 어떤 추상적 존재를 세워놓는 것이 피차 편리하고 안전하고 지속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권위의 변동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추상적 권위의 상징체가 여러 가지로 언어형태로 나타났을 것이며, 그것을 우리가 보통 총괄해서 "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또 초월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하늘이라고 부르기도 했을 것이다. "하늘"은 높고 보편적이며, "땅"이라는 공간에 대해 초월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은나라는 상제 중심사고가 매우 강한 문명국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주나라는 천명을 상제로부터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상제의 대행자인 국왕이 천자의 권위를 가지고 공동체의 확실한 구심정으로 등장했다. 따라서 상제의 인간화가 일단 이루어진 셈이다. 더구나 주나라는 인지의 발달과 인간세의 경험의 축적에 힘입어 혁성혁명을 달성함으로써 출발한 왕조였기 때문에 혁명의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혁명"이란 다름 아닌 "천명"을 갈아버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세상의 주재자가 상제라는 인격신이 아니라 상제로부터 받은 천명이며, 천명은 결국 인문적인 왕국의 공동운영의 질서의 권위를 의미했다. 주나라의 전자는 반드시 그 공동체에 건전한 질서를 부여하는 목적을 구현할 때만이 천명을 보전하는 것이다. 그러지 못할 때는 천명은 상실되고 만다. 따라서 천명은 하늘의 소리라기보다는 공동체의 평화와 번영을 요구하는 공동체구성원들의 근원적 요청이 결집된 소리였다. 하늘의 소리는 곧 사람의 소리요, 백성의 소리요, 민중의 소리였다. 따라서 왕은 인중의 소리를 들을 줄 하는 자만이 왕으로서의 자격이 있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는 천자 즉 하늘의 아들이 아니다. 혁명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