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방지강, 북방지강, 자로지강
[너그러움과 유순함으로써 가르쳐주고, 무도함에 부복하지 않는 것이 남방의 강이니, 군자가 이에 거한다.]
노자는 "타인을 이기는 자를 힘세다 할지 모르지만 자기를 이기는 자야말로 강한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딱딱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라는 구절이 있고, "하늘 아래 가장 여린 것이 하늘 아래 가장 단단한 것을 앞 달린다."라는 구절이 있고, "연약함을 지킬 줄을 아는 것이야말로 강함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남방지각을 보통 이러한 노자의 사상으로써 해설하는 경향이 있으나 실로 노자의 사상은 우주론적, 존재론적 맥락에서 "유약"과 "강강"을 대비시키고 있으며 그것은 거의 자연주의적 명제에 가깝다. 유약이 강강을 이기는 것은 자연의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관유"는 그러한 근원적 가치의 전도를 말한 것이 아니라 치세나 접안에 있어서의 관용을 말한 것이다. 관대한 삿대로써 백성들을 부드럽게 다스린다는 것이다. "국어" 제어에는 "관혜유민"이라는 말이 있다. 너그럽게 은혜를 베풀어 백성이 마음을 부드럽게 만든다는 뜻이다. "순자" 불구편에는 "군자는 관대하여 사람을 깔보는 법이 없다."라는 말이 있고, 또 "부드럽게 따르면서도 흐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모두 유가적 맥락에서 인간관계의 덕성을 말한 것이다. 도가의 맥락과는 다르다. "불보무도"도 노자가 말하는 "보원이덕"과는 다르다. 노자가 말하는 것은 오히려 예수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로기온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불보무도는 맹자의 다음과 같은 논의에 더 깊게 상통한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잇는데 나를 대하기를 횡역으로써 하면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를 반성하여, 내가 반드시 인하지 못한가 보다, 내가 반드시 예가 없었나 보다, 어찌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겨날 수 있겠는가 한다. 스스로 반성하여 인하여 쓰며, 스스로 반성하여 예가 있어는데도 불구하고 그 횡역이 전과 같으면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를 반성하여 내가 반드시 충하지 못하였는가 보다 한다.
"순자" 영욕편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대저 타인과 참지 못하고 쌈박질을 잘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가 옳고 남은 틀리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자기는 진실로 옳을 뿐이요, 타인은 진시로 틀린 뿐이니, 그렇게 되면 나야말로 군자요 타인은 모든 소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군자라는 사람이 소인배들과 같이 서로 헐뜯고 싸워 자신을 해치고 마니, 아래로는 자기 몸을 잃는 것이요, 안으로는 자기 부모를 잃는 것이요, 위로는 자기 임금을 잊는 것이다. 어찌 그 과실이 심하다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이 모두가 합리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치열한 자기반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거지"의 "거"는 "거"의 뜻이 있다. 자기 삶의 방식을 근거지 운다는 뜻이다.
"관유이교"라는 것은 무한한 포용력과 겸손한 순종심을 가지고 타인의 불급한 점을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불보무도"는 나에게 횡역의 사태가 다가올 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폭력으로써 돼 치지 않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남방은 풍기가 유약하여, 포용하고 인내하는 힘이 범인의 수준을 넘어가는 것을 강으로 인정한다. 군자의 도라 해야 할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비타협 저항운동이 이러한 남방문화의 정신과 상통하는 것일까? 간디는 써로우에게서, 써로우는 노자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병기와 갑옷을 입고 전투에 임하여 죽더라도 싫어하지 않는 것은 북방의 강이다. 네가 말하는 강자는 결국 여기에 거하겠지]
"금"은 병기이다. 금속으로 만든 무기를 가리킨다. "혁"은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가리킨다. "금혁"은 추상화되어 "전투"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임"을 정현이 "임, 유석야"라고 주를 다는 바람에 그것이 거의 정설화 되어 주희가 계승하였고, 오늘까지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색하다. "석"이란 "자리" 혹은 "깔개"라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그 뜻은 전장에 나가 갑옷을 깔고 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현의 주 때문에 이러한 억지해석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 해석은 "임"의 본의로 간주하기 어렵다. 정현은 "임"을 "인"의 가차자로 보아서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임"은 본시 옷의 깃, 혹은 섶을 의미한다. 우리말에 "옷깃만 여민다"는 말이 있는데, "임금혁"은 갑옷을 단정하게 입고 무기를 차고 전투에 임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야전에서 갑옷 벗고 쓰러져 자는 모습보다는, 전투에 임하는 공격성을 강하게 나타내는 뉘앙스를 풍기는 말로써 해석되어야 한다. 그래야 남방지강을 의미하는 "관유이교"와도 강렬한 대비가 성립한다. "임"은 "임"의 가차자로 볼 수도 있으며, 그렇게 되면 전쟁에 나가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사 이불염"의 "이"는 단순한 접속사로 보기보다는, "사"를 강조하는 조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절에서 가장 결정적인 해석상의 문제가 "이강자거지"의 "이"에 있다. 보통 "이"를 단순한 접속사로 보아 특별히 해석을 안 하고 지나쳤는데, 여기의 "이"는 문제가 되었던 "억이강여"의 "이"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강자거지"는 "여강자거지"가 된다. 앞서 지적한 대로 공자는 3종류의 강을 말한 것이 아니라, 남방지강과 북방지강을 대비적으로 언급하고 그 맥락에서 자로가 지향하는 강의 성격을 규정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자로 네가 마음에 두고 있는 강이란 결국 "북방지강"에 해당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셈이 된다. 자로의 스타일은 북방민족의 전형적 용맹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혁"이라는 말과 관련하여 공자와 동시대의 문명으로 가장 호전적이고 무술과 기마술과 호전성과 재빠른 이동성과 금속제련 기술에 뛰어났던 스키타이 문명을 생각할 수 있다. 스키타이 문명은 북방아시아대륙에서 이동한 것이다. 그리고 스키타이 문명이 역으로 아시아의 북방문명에 영향을 주었고, 또 그 영향이 조선문명에까지 뻗쳐 내려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북방기마민족의 호전성이란 공자시대에도 하나의 관념으로서 정형화되었고 그 구체적인 근거가 확보된다고 말할 수 있다.
"임"이란 자리, 깔개이다. "금"은 과 나 병기를 총칭하는 말이고, "혁"은 갑옷류를 총칭하는 말이다. "북방"은 풍기가 강격 하기 때문에 과감한 힘으로써 타인을 이기는 것을 강으로 삼으니, 이는 강자가 종사하는 일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진부한 해석이다. 주희는 "이"의 특별한 함의에 관하여 주목하지 않았고, 질문자인 자로가 지향하고 있는 강함이 남방지강과 북방지강의 관계에 있어서 어떠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맥락적으로 논구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군자는 화합하면서도 흐르지 않으니, 아~ 그러한 강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가운데 우뚝 서서 치우침이 없으니, 아~ 그러한 강함이 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나라에 도가 있어도 궁색한 시절에 품었던 지조를 변하지 아니하니, 아~ 그러한 강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나라에 도가 없어도 평소에 지녔던 절개를 죽임에 이를지언정 변치 아니 하니, 아~ 그러한 강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많은 주석가들이 남방지강을 불급으로 보고, 불방지강을 과로보고, 과불급이 없는 진정한 중용의 강을 마지막으로 논구하는 것으로 보는데, 그것은 매우 어색한 관점이다. 남방지강과 북방지강은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강이며, 관유불보하는 남방의 강을 불급이라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또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애초로부터 남방지강과 북방지강과 자로로지강의 3종류를 설정하였고, 이제 마지막으로 자로지강을 이야기한다고 보는 것도 그릇된 관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자로의 평소의 성격은 북방지강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며, 남방, 북방의 대비적 성격을 논구 한 후에 "너 자로의 강"은 북방지강을 말하는 것이라고 공자는 이미 정확한 판결을 내렸다. 따라서 자로의 문제의식에 관한 담론은 이미 완결된 것이다. 이제 마지막 모든 강함의 가능성에 대하여 인간이 진정으로 구현해야 할 보편적강을 지역적 특성이나 인간적 기질의 특성과 무관하게 논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치우침이 있는 남방지강이나 북방지강에 대하여 자로가 걸아가야만 할 정도의 강을 제시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는 있겠지만, 담론은 자로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모든 학인들에게 발하는 메시지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과는 달리, 주제의 정답을 일거에 제시한다는 것이 다르다. 다라서 동방에는 서방식으로 변증법에 부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