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의 미래이 불확실성
[지성의 도를 구현한 사람은 세상 일을 그것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알 수가 있다. 국가가 창자 흥하려고 하면 반드시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나며, 국가가 장차 망하려고 하면 반드시 요망스러운 재앙의 싹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길흉의 조짐은 산대점이나 거북점에도 드러나고, 관여된 사람들의 사지동작에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하나 복이 장차 이르려고 할 때, 지서의 도를 구현한 자는 그 원인이 되는 좋은 것도 반드시 먼저 날며, 종지 않은 것도 반드시 먼저 알아 계신한다. 그러므로 지성은 하느님과 같다고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중용을 종교적인 것으로 보고 귀신장과 관련 지어 말하나, 이것은 대오류이다. 종교나 귀신과 전혀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투철한 과학정신을 표방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예사람들이 종교에 의존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미래의 불확실성이었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예견하는 힘이 신이 나 신과 소동하는 자들에게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점이 그들의 종교적 예시의 가장 중요한 테마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러한 문제가 상당 부분, 과학으로 해결되오 있다. 오늘날 과학이 종교를 대신하는 힘을 갖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미래를 예측하는 법칙적 사유 때문이다. 인류사에서 과학과 종교는 예측가능성이라는 힘으로 서로 중첩되어 있다. 그러나 종교는 비합리적 방법에 의존하는 반면, 과학은 합리적 법칙에 의존한다. 그리고 과학은 밥리적 법칙이 적용될 수 없는 인간 개인이 운세와 같은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데 반하여 종교는 그러한 영역을 가직도 장끼로 삼아 장사를 해 먹고 있다. 그러나 과학도 인간의 건강상태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을 통해 그 인간의 생사를 정확히 예측할 수도 있다.
그런데 국가의 흥망과 같은 것이며, 이것은 사화과학적 통찰력에 따라서도 충분히 예측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성의 경지는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예측할 수 있는 허명한 능력을 보지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성은 하느님과도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은 "지성지도, 가이전지"라는 말에 있어서 "전지"라는 동사의 주어가 지성지도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자들이 지성지도가 전지의 목적인 듯이 애매하게 번역하는데 그것은 오류이다. 지성지도를 미리 아는 것이 아니라, 지성지도가 미리 아는 것이다. 그것은 시비적 영감이 아닌 모든 상황 대한 투철한 통찰이다. "선", "불선"은 주로 화복의 원인이 되는 사람의 선사와 불선사를 말한다.
"동호사체"를 희생제물의 사지에 나타나는 조심으로 볼수도 있으나, 나는 주히의 주석을 참고하여 사람에 나타나는 조짐으로 보았다. 구체적으로는 시귀점과 관련된 재위자의 행도거지를 지칭할 것이나 더 추상적인 관계의 지시체일 수도 있다.
"국가"는 국과 가가 아니라, 단일개념으로서 국가이며, 자사의 시대에는 노라나, 제나라, 초나라와 같은 국이었다.
정상이라는 것은 복의 조짐이다. 요얼이라는 것은 화의 싹틈이다. 시는 그것을 가지고서 산대점을 치는 것이요, 귀는 그것을 가지고서 복점을 치는 것이다. 사체라는 것은 동작을 위의 의 사이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은 길흉의 조짐이 몸의 동작에 ㄴ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 정공 15년조에 보면 주나라 은공이 노나라에 와서 조의 예를 했는데 자공이 그것을 구경했다고 하는 장면이 기술되어 있다. 이때 주나라 군주가 옥을 노나라 군주에게 선물로 드릴 때에 옥을 너무나 높이 들어 그의 신체가 너무 위로 올라가고 노나라 정공 그 옥을 받는 자세가 너무 낮아 신체가 아래로 구부러지는 것이었다. 이대 자공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의를 차리는 거동을 보아서는 두 군 주가 다 곧 돌아가실 것이다. 대저 예는 사람이 죽고 살고, 나라가 보존되고 망하게 되는 본체가 되는 것이다"라고 예견했는데 그 예견이 들어맞았다. 무릇 이와 같은 것들은 모든 필연적 리가 먼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오직 성이 자극하여 한 트럭의 사사로움과 거짓이 마음과 쿤 사이에 머 물러 있지 않은 사람이라야 그 오묘한 기미를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신"은 귀신을 일컫는 것이다.
"동호사체"를 정현은 거북이의 사족으로 이해했다. 주희의 해석이 더 낫다 주의가 말하는 기는 주역 계사 하오에 나오는 개념이다. 그 오묘한 기미를 아는 것은 하느님이 경지일 것이다. 군자는 윗사람과 교체하면서도 아첨하지 아니하고, 아랫사람과 교체하면서도 권위를 함부로 허물지 않는다. 아첨 지아니 함과 함부로 친하지 아니 함과 치나지 안니 함이 모두 오묘한 중용의 기미이다. 군자란 그러한 기미를 파악할 줄 ㅎ아는 자이로다. 기야말로 동의 미묘한이요, 길흉이 먼저 드러나는 갈림길이다.
[성은 스스로 이루어가는 것이요, 도는 스스로 길 지워 나가는 것이다.]
내가 중용 전체에서 가장 강렬하고 가장 명료한 테마를 담고 있는 한 구절을 뽑으라면 서슴지 않고 이 절 한마디를 뽑을 것이다. 여기서 "성"과 "도"는 반드시 전도와 인도의 개념으로 나눌 수 없으며, 주희가 말하는 "심과 "리"의 개념으로 나누어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 우주의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나타낼 두 새 겸일 뿐이다. 상호보완적이 개념이며 인간과 천지자연에 모두 적용된다. 성과 성, 도와 도라는 동음이 의어적인 쌍관의 묘미를 살리는 명언 아라할 것이다.
자사가 말하느 우주는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형성해가고 조직해가고 우주이다. 일체의 타율적 간섭이 없다 다시 말해서 중요의 하느님은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형성해 가는 과정적 하느님이다. 화이트헤드 유기체론적 우주를 말하면서도 그 생성이 미러 이미지로서의 하나님을 따로 설정하였는데, 자사는 화이트헤드의 우주에서 하나님을 제거시킨 우주를 말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 세계의 현실태가 불완전하며, 그것은 환성을 위해여서는 세계의 모든 엔티티 근저에 그것의 보완을 위한 영원적 각체가 아닌 현실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이 요청된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