誠(성) 그 자체는 하느님의 道(도)입니다
[성 그 자체는 하느님의 도입니다. 성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입니다. 성 그 자체는 힘쓰지 않아도 들어맞으며, 고민하며 생각하지 않는데도 얻어지며, 마음을 탁 놓고 편안하게 있는데도 도에 들어맞으니 이것이야말로 성인의 경지라 할 수 있지요. 성해지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선을 택하여 굳게 잡고 실천하는 자세이니 보통 사람의 경지라 할 수 있지요.]
여기 "천"을 내가 "하느님"이라고 번역했는데 "천"은 단순히 "천지"의 축약태일 수도 있지만, 그 근원에는 귀신의 의미가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상제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중원의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디비니티를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문이라는 언어 자체가 명사화된 주어 단위가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동학에서 말하는 "하늘님"이며 "전주"이며 "인내천"의 "하늘"이다. 유대교-기독교 하나님이 질투하고 사랑하고 도륙하고 불태우고 위협하고 엄포하니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성실한"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실로 많은 인간세계의 얽힘이 저절로 풀리게 될 것이다. 존 레논은 꿈꾼다. 천당도 지옥도 없는 푸른 하늘만을 나라도 종교도 사라지고 탐욕과 굶주림이 사라지고 동포애로 가득 찬 세상을! 꿈꾸어 보라, 꿈꾸기처럼 쉬운 것이 어디 있겠나? 언젠가 너희도 나의 꿈에 동창하겠지. 자사가 이미다 꿈꾸었지 아니한가! 같이 꿈꾸어 보자! 천당 없는 저 성의 푸른 창공만을!
기독교인들은 고린도서전서 13장에 나오는 ㅂ울의 사랑예찬을 지고의 기독교 교리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바울의 사랑은 비록 "아가페"를 말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적인 사랑일 뿐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하니 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명제들의 주어는 고린도교회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이지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 바울의 사랑 예찬은 거의 동일한 문학을 플라톤의 심포지엄에 나오는 시인 아가톤의 열렬한 연설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여기 나오는 사랑이 라틴어성경에서는 카리타스로 되어 있는데, 이것에 영향을 받아 위클리프는 "사랑"을 모두 "자비"로 번역하였다. 그것은 인간적인 자선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바울은 "사랑"의 개념을 인간적인 자선으로 본 것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은혜로 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곧바로 하나님의 속성으로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 사랑을 하나님의 술부로 만든 것은 요한이었다.
동방인의 사유 속에는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하나님은 말을 해서도 아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분별과 미움의 주체로 격하시키는 인간의 행위일 뿐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면 아니 된다. 사랑하면 그것은 반드시 미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의 주체로 파악하는 모든 종교는 천박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편협한 감정의 구획 속에 하나님을 감금시키는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의 성론을 펼치고 있는 순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한번 되짚어 보자!
"하늘은 아무런 말도 아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 높음을 예찬하고, 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 후덕함을 존숭한다. 사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의 예견된 움직임에 따라 삶을 설계한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시는 이러한 묵묵한 항상스러움을 가지고서 그 자체의 성실함을 자극하게 할 뿐이다."
여기에서 바로 우리는 "상"이라는 개념과 "성"이라는 개념이 연결되고 있는 것을 본다. "상"은 바로 중용의 전분부에서 "증"과 "용"의 개념과 밀착된 개념이었다. 그리고 순자에게도 상과 성은 이미 언어적 분별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도가도비상도라는 노자적 관점이 수용되어 있는 것이다. 노자 왕 필주가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천지가 사랑을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큰 일 날 일이다. 그래서 불인하다고 한 것이다. 인이라고 하는 도덕적 덕목은 반드시 만들고 세우고 베풀고 교화시키고 하는 사랑의 행위를 포함한다. 그리고 또 은혜가 있고 함이 있다. 만들고 세우고 베풀고 교화시키고 하는 사랑의 행위를 포함한다. 그리고 또 은혜가 있고 함이 있다. 만들고 세우고 베풀고 교화시키고 하면 사물은 그 본래의 순수한 진실성을 상실해 버린다. 그리고 또 은혜가 있고 함이 있고 하면 사물은 편안하게 공존할 수 없게 된다.
서구인들은 과연 이러한 "사랑의 죄악"을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우리가 살고 있는 천지와 인간세계를 파괴하는 끔찍한 유위의 소산인지를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요한의 명체를 의식 없이 뇌까리며 도취할 수 만 있겠는가? 사랑을 하지 말자! 단지 성실로써 묵언하자!
여기 "성자"와 "성지자"의 구별은 매우 명료하다. "성자"는 성이 그 자체이다. "성지자"의 "지"를 지시대명사로 보아 "신"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지"는 구체적인 지시체를 가질 때도 있지만, 그러한 지시체가 없이 앞의 글자를 동사화시키는 기능을 수행하는 접미사일 수도 있다. "성"은 칸트가 말하는 바 물자체에 비유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지"는 그 물자체로 접근해 가는 인간의 노력이며 과정이다. 과정은 필연적으로 동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동사적 세계일 수밖에 없다. 명사적 이상은 성의 세계며, 동사적 가정은 속의 세계이다. 그러나 성과 속은 서구인들의 사유에 있어서처럼, 혹은 원시인들의 사유에 있서처럼 이원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이라는 하나의 가치로 연결되어 있다. 단지 "지"의 유무의 차이일 뿐 아무런 질적, 차원적 차등이 없다. 맹자는 "성지자"를 "사성자"로 바꾸었다. 성을 끊임없이 생각하며 성에게로 끊임없이 접근하는 노력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바꾼 것이다. "성지"의 애매함을 보다 명료하게 하기 위하여 "사성"으로 바꾸었는데 역시 좀 졸렬한 레토릭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의 레토릭만 보아도 가어 중용 테스트에 선행한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여기 "불면이중, 불사이득, 종용 중도" 운운한 것은 생지나 안행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며 혼동될 수 없다. 단지 지력이나 행력의 차이를 말한 것이고, 여기는 성의 차원을 말한 것이며 도가적 사유가 들어와 있다. 이것은 주희가 혼동하고 주석을 단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종용 중도"는 논어의 "종심소욕불유구"와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종용"의 의미는 장자 추수의 그 유명한 호량지상의 대화에서 물고기가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을 탁 놓고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을 형용하는 말로써 쓰이고 있다.